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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젤라 오] 조정관의 삶, 불공정을 공정으로 바꾼다

한인 출소자 재활 돕고 난민 지원 봉사활동도 한인사회 돌아와 기뻐 “민족학교 성장 도울 것” 2021년 6월 25일. 조지 플로이드 목을 무릎으로 눌러 질식사시킨 혐의로 기소된 전 미니애폴리스 경찰관 데릭 쇼빈(45)에게 22년 6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플로이드가 사망한 지 1년 만에 나온 결과다.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짓눌려 숨을 쉴 수가 없다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이를 외면하고 웃고 있던 이 백인 경찰은 앞으로 전체 형량의 3분이 2인 약 15년을 복역해야 가석방될 수 있다. 교도소에 남게 되는 쇼빈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일반 수형자들과 함께 지내는 대신 별도의 공간에서 수형 생활을 마칠 것이다. 항소를 통해 그의 형량이 감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진행된 재판 내용과 판결을 보면 미국이 흑인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는 모습이 보인다. 소수인종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인식 변화를 예고하는 것일까. #불공정한 사건을 중재하다 미국 사법 시스템에는 변호사와 검사, 판사 외에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조정관(Mediator)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원고와 피고인 사이에서 합의를 끌어내는 임무다. 조정관은 많은 법률적 경험이 필요하다. 양쪽이 원하는 합의를 끌어내려면 원고가 소송을 제기한 이유와 이로 인해 파생할 일들을 파악해야 하고 반대로 피고인의 입장과 억울한 점 등을 듣고 중재해야 하므로 주로 은퇴한 변호사나 검사, 판사들이 일한다. 내가 2013년부터 선임 조정관(Senior Attorney Mediator)으로 일하는 캘리포니아주 공정채용주택국(DFEH)에 접수되는 케이스는 대부분 ‘불공정’이 이유다. 채용 절차에서, 근무 환경이, 집을 계약할 때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주민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신고한다. 주 정부는 접수된 케이스를 조사한 후 개인을 대신해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조정관을 통해 양쪽이 합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조정관에게 넘겨지는 케이스는 예민한 내용이 많다. 지금 맡은 케이스 중 한 건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과 관련돼 있어 극도로 조심하며 중재하고 있다. #새로운 출발을 돕다 얼마 전 수형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한인을 만났다. 오랫동안 내가 봉사하고 있는 비영리기관의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프리즌투플레이스’로 불리는 이 프로젝트는 출소자의 재활을 돕는 곳이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앳된 얼굴이었는데 눈앞에는 30대 중반의 성숙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자신처럼 젊었을 때 감옥에 갔다가 풀려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열정이 뜨거웠다. 가주는 장기 수형 생활을 마친 이들이 사회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석방되기 최소 6개월부터 1년까지 준비를 시킨다. 생활에 필요한 각종 시스템 사용법도 교육하고 일부이지만 렌트비 지원도 한다.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출소자도 있다. 사기죄에 연결된 범죄자가 그렇다. 이들에게는 경제적인 도움이 전혀 없다. 이민자가 비도덕적 범죄를 저지를 경우 추방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리 주 정부가 지원해도 가족이 없는 출소자는 갈 곳이 없다. 게다가 일자리를 찾는 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이다. 결국 경제적으로 힘들고 새로운 기회를 찾지 못하는 이들은 삶을 포기하고 다시 범죄의 길로 돌아간다. 2000년대 초 만난 김모(당시 19) 군이 그랬다. BMW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내 사무실로 찾아온 그는 처음엔 마약 복용 혐의로, 두 번째는 강도, 세 번째는 마약판매 혐의로 감옥을 수차례 들락거렸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덕에 생활은 풍족했기에 김군은 체포되면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에게서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했고 친구들에게도 외면당했다. 김군은 내게 찾아와 “다시 감옥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교도소 생활이 더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흑인 사회는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이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기관이 많다. 한인 커뮤니티가 생각해 볼 문제다. #다시 한인사회로 오다 나는 지금도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는 것이 좋고 즐겁다. 지난 2016년부터 이사로, 또 지금은 이사장직을 맡은 민족학교도 그중의 한 단체다. 최근 민족학교의 직원들이 미국 노조에 가입했다는 뉴스가 한인 커뮤니티에 이슈가 됐다. “비영리단체가 노조라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가 자신들의 일자리와 월급을 위해 싸운다”는 등의 말들이 쏟아진다. 미국에 노조법이 생긴 건 1930년대다. 당시에는 아동 노동 착취 등의 불법 행위를 막기 위해 마련됐다. 초창기 막강했던 노조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추지 못하고 동력을 잃어갔다. 현재 미국 전체 노동자의 6%만 노조에 가입돼 있다. 민족학교 이사장으로 변호사로 나는 노조 활동을 지켜볼 생각이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민족학교는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 #아직 남은 여정 이번 주말에도 롱비치를 가야 한다. 지난해 멕시코 국경에서 데려온 과테말라 출신 난민 가족의 일자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청소일이었지만 1주일에 몇백 달러라도 벌면 일단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이들이 살 집도 알아보고 있는데 렌트비가 만만치 않다. 내가 매달 후원하는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어 아무래도 친구에게 후원을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이들 가족은 국경에 머무는 난민들을 후원하는 단체에서 법률고문으로 자원봉사하다가 만났다. 막상 데려왔지만 갈 곳이 없는 이들 가족을 친구에게 잠깐만 데리고 있어 달라고 떠맡기다시피 한 게 벌써 수개월째다. 만나서 말도 못하는 코로나19팬데믹 기간이었지만 이 친구는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난민을 내 차에 태워 국경을 넘을지 모른다. 또 얼마나 많은 한인 출소자를 만날지 모른다. 그래도 좋다. 아직 내겐 에너지가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심장이 있다. 한인 재소자 현황 연방 법무부가 2010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안 재소자는 전체 아시안 인구의 1.5%로, 인구 10만 명당 210명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숫자상으로는 약 19만 명이 넘는 규모다. 다른 인종의 경우 백인은 인구 10만 명당 450명, 히스패닉은 831명, 흑인은 2306명이다. 또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아시안은 2021년 6월 19일 현재 2289명이다. 가주내 한인 재소자에 대한 가장 최근 통계는 2005년 가주교정국이 공개한 국가별 재소자 통계로 당시 한인 재소자는 216명이었다. 이중 60%인 129명이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추방대상자로 분류됐다. <2005년 3월 18일 A-1면> 그해 2005년 하와이대의 카렌 우메모토 교수와 앤젤라 오 변호사가 발표한 ‘아시안 재소자 재수감률’이란 제목의 논문에 따르면 아시안 재소자의 절반 이상이 27세 미만으로 파악됐다, 가장 많은 연령대는 18~22세로 전체 아시안 재소자의 31%를 차지했다. 또 다른 인종에 비해 살인, 과실치사, 폭행, 강도 등 강력범죄 비율이 높았다. 당시 주 및 연방교도소 수감자 조사에 따르면 아시안 재소자의 56%가 폭력범죄로 투옥됐다. 전체 재소자는 48%가 폭력범죄에 연류됐다. 반대로 전체 재소자의 64%가 재산 및 마약 관련 범죄로 투옥중이었지만 아시안 재소자는 39%로 2배 가까이 낮았다. 아시안 출소자의 재수감률도 높다. 출소자의 42.7%가 다시 체포됐고 47%가 재수감됐다. 흑인의 경우 각각 80%와 73.9%, 백인은 각각 68%, 63%로 나타났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7-07

[앤젤라 오] 성실한 부모님 보며 봉사와 베푸는 삶 배워

유학생 대접한 외할머니 통해 나누는 삶·봉사 정신 깨달아 학생 점수 매기는 교수직 포기 공통 관심 ‘선’ 통해 남편 만나 엄마는 지금도 매일 하나님께 기도한다. 4명의 자녀와 7명의 손자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주말마다 찾아가 뵙는 아버지는 늘 행복하게 웃으며 “나의 앤젤라! 어서 와”라고 말하며 맞는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벌써 90세가 됐다. 날이 갈수록 어린이처럼 변해가는 아버지 옆에서 엄마는 매일 잔소리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챙긴다. ▶평범한 어린 시절 나는 1남 3녀 중 맏이다. 이민 가정의 삶의 무게를 나눠서 지는 맏딸이었다. 아버지(오삼률·91)는 시 정부 기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오영숙·78)는 한인타운에서 개인 사립학교를 운영하다 나중에 샌퍼낸도 밸리에 있는 매그닛스쿨에서 교사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모든 맞벌이 가정이 그렇듯 나는 부모를 도와 동생들을 책임지고 돌봐야 했다. 밥을 차리는 건 기본이었다. 3살(크리스털), 9살(캐런), 13살(데이비드) 터울의 세 동생의 끼니를 챙기고 숙제를 챙겼다. 저녁에 퇴근하는 부모님을 위해 저녁도 만들어놔야 했고 빨래도 해야 했다. 토요일에는 동생들과 함께 대청소를 했지만 대부분은 내 몫이었다. 운전면허증을 받은 날부터는 동생들의 학교 픽업을 도맡았다. 정말 쉴 틈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큰언니’, ‘큰누나’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맡았던 역할은 고스란히 둘째에게 넘어 갔다. 당시에는 그렇게 지내는 게 당연하고 또 그게 자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자녀가 없는 결혼생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게 어릴 때 동생들을 돌보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체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외할머니 통해 봉사의 기쁨 배워 부모님은 매일 성실하게 사셨다. 주중에는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종일 지내셨다. 장로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노래를 잘하셨는데 성가대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웃과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녀들도 잘 키웠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변호사가 됐고, 둘째는 의사 남편을 만나 잘 살고 있다. 세째는 의사가 됐고 막내는 사업가로 크게 성공해 포틀랜드에 살고 있다. 자녀 모두 결혼해서 손자·손녀가 7명이나 생겼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이민자의 삶이다. 동생들이 어릴 때 외할머니가 미국을 방문했다. 제퍼슨과 익스포지션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4~5년을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당시 교회에 유학생들이 오면 항상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그래서 주말이면 늘 방문자들로 집이 북적였는데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해 먹이는 걸 좋아한다. 내가 지금까지도 커뮤니티를 위해 무언가 하는 걸 좋아하고 그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도 그때 보고 배운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일이 많고 힘들다고 했지만 할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렸다. 누군가에게 베풀기 위해 함께 일하고 가진 걸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나는 할머니와 엄마의 얼굴에서 늘 볼 수 있었다. ▶돈·명예 대신 선택한 커뮤니티 나는 부모님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어릴 때는 교회에 잘 나가지 않았고, 커서는 “하지 말라”는 한인 커뮤니티의 일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교회는 늘 학교 활동이나 공부 등을 이유로 빠졌다. 시작은 친할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에서부터다. 목회자였던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재혼해 동부로 떠난 게 어린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남가주에 한인 거주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교회에는 소문이 다 났고 나는 솔직히 창피했다. 교회에 가기 싫어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계속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동부에 정착한 할아버지가 의대에 진학해 원하는 공부를 하고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를 통해 들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동부에 가서 장례식을 도맡아 치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가 미웠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변호사가 된 뒤에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커뮤니티 관련 일을 하러 다녔다.사람들은 내게 리더의 역할을 끊임없이 주문했다. 하지만 나는 앞장서서 그룹을 끌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갈 수 있게 앞에 있는 나무를 자르고 먹을 수 있게 밥을 지어주는 역할이 좋았다. 그런 나를 보며 부모님은 “돈도 생기지 않고 욕만 먹는 일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속상해 했지만 난 상관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사실이 그때만큼 감사한 적이 없었다. ▶나무 베고 쌀 씻는 게 내 역할 형사법 변호사의 길을 떠나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여기저기 생겼다. UCLA에서 나는 인종과 미국법, 21세기 리더십을 가르쳤다. 이때 지금의 남편도 만났다. 중국계 예술가인 그는 당시 UCLA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 우리는 ‘선(Zen)’에 대해 얘기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외부에서는 ‘교수’의 삶이 좋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학에 남아 가르치는 역할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학생들과 만나 대화하고 가르치는 것은 좋았지만 그들의 제출한 숙제를 읽고 분석해 점수를 매기는 게 그중 가장 어려웠다. 학생 개인의 재능을 존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냥 강사나 펠로의 역할이 내겐 더 쉽고 어울렸다. 내게 선을 처음 가르친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느냐고. 그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고기만 있고 다른 먹을 것이 없다면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의 답을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갇혀있던 나 자신에게서 풀려나 자유로움을 느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6-30

[앤젤라 오] 목사 손녀가 ‘젠(Zen)’ 전도사 되다

9·11 테러사건 계기로 카운티 직원 상담 맡아 인종 갈등 해결책은 ‘마음’ 선 명상으로 하루 시작 이민자 커뮤니티의 성장은 인종별로 조금씩 다르다. 한 예로 일본계 커뮤니티는 농구가 중심이 되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는 LA 다운타운 리틀도쿄나 토런스, 가디나 지역에는 청소년 농구팀들이 꽤 유명한데 그 이유는 쟁쟁한 일본계 학생들이 넘쳤기 때문이다. 일본계 가정들은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농구를 가르쳤다. 지금도 이 전통은 계속되는 것 같은데 팀워크와 경쟁을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어릴 때 농구를 하면서 다진 우정은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연결됐고 이는 일본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단단한 네트워크가 됐다. 반면 중국계는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사업은 물론 개인적인 만남도 가족의 일원을 알아야 연결이 됐기 때문에 인맥이 중요하다. 그런데 한인 커뮤니티는 교회가 중심이었다. 교회를 통해 사람들은 만남을 이어갔고 사회적인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전쟁 이후 빠르게 성장했다. 배고픈 이들이 교회를 찾아가면 선교사들은 먹였다. 기독교는 한국에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런 기억들로 인해 낯선 미국 땅에 도착해 마음을 잡지 못한 한인 이민자들이 교회를 마치 고향 집처럼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라며 네 편 내 편으로 나눠 끊임없이 싸웠다. 싸움의 원인을 들어보면 양쪽 모두 타당했다. 2세인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교회에서 점점 멀어지다 친할아버지는 목사님이었다. 그것도 미주 한인 교회사를 상징하는 LA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했었다. 목사의 아들인 아버지의 큰 딸로 태어난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늘 내가 갖고 있던 삶에 대한 질문의 답은 교회에서도, 성경에서도 찾지 못했다. LA폭동이 일어났을 때 폭동이 지나고 난 후 겪은 수많은 경험에 ‘왜’라는 질문을 들고 교회를 찾아가 밤새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 답도 들을 수 없었다. 형사법 변호사의 길은 무거웠다. 평범한 아이들이 살인죄로, 마약 관련 범죄자로 체포되고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가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마음의 짐이 무거워졌다. 조금씩 지쳐갔다. ▶9·11 이후 재발견한 삶의 의미 2001년 9·11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조직 알카에다의 일으킨 테러 사건으로 30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고 최소 6000여 명 이상이 부상했다. TV 화면을 통해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무너지는 모습에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본 모든 사람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LA카운티 정부의 요청으로 인간관계위원회 산하 특별 자문위원으로 임명됐다. 내 임무는 산하 22개 부처를 다니며 직원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시간도 자유롭게 쓰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상한 업무였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폭탄을 안고 빌딩으로 돌진하는 장면을 보며 느낀 충격과 스트레스, 삶의 허무함 등을 직원들은 나에게 털어놨다. 그들은 가족과 동료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고 함께 할 방법을 알고 싶어했다. 대화 속에 인종 간의 갈등 문제는 없었다. 나는 함께 그들과 웃고 울었다. ▶지친 마음 ‘선’으로 달래다 LA폭동이 10년을 맞으면서 한인 커뮤니티도, 주류사회도 LA폭동의 기억과 아픔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을 때였다. LA폭동 이후 인종갈등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늘 긴장했던 나는 죽음 앞에서는 날카로운 법률적 지식과 논리가 아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의 삶 속에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명료해졌다. 법을 저지른 청소년을 변호하는 법정 대신 다른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때마침 UCLA에서 강의를 가르쳐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사회와 인종갈등, 인권에 대해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마다 UCLA 교수 자격으로 캠퍼스에서 강의하며 학생들을 만났다. 또 가주 검찰청 특별검사로 청소년 범죄예방 프로그램 운영을 맡았다. 하지만 전국 곳곳에서 들어오는 강연 요청을 아예 뿌리칠 수 없기에 소수계와 여성 인권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알리는 행사는 가능한 참석했다. 개인 변호사 사무실은 거의 나가지 않았다. 가끔 비즈니스 운영이나 형사법과 관련된 컨설팅만 했다. 그러다 모임에서 우연히 ‘선(Zen)’을 알게 된 후 명상을 시작하게 됐다. 매일 아침 명상하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찾았다. 젠을 더 배우기 위해 하와이에 집을 얻어 수개월씩 머물기도 했다. ◈미주 한인 기독교 역사 미주 한인 기독교 역사는 한인 이민사와 함께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1903년 당시 인천항을 출발해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 선조들은 여정을 푼 곳에 예배 처소를 세우고 사탕수수 농장일을 하면서도 매주 일요일이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하와이 교회의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05년에 모든 하와이 감리교인들 중 65%가 한국인이었으며, 1910년에는 68%가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미국 본토에는 1936년 나성한인연합감리교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LA국제공항 근처에 있는 이 교회는 지금 2~3세가 주축이 되어 활발히 모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 교회는 2019년 3500여개 교회로 성장했다. 비영리재단 재미한인기독교선교재단(이하 KCMUSA)이 지난 2019년 8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주 지역내 한인교회는 총 3514개다. 캘리포니아주에 1008개로 가장 많고 그 뒤로 뉴욕(280개), 조지아(194개), 텍사스(189개), 일리노이(172개), 워싱턴(166개), 뉴저지(157개), 버지니아(154개) 순으로 파악됐다. 또 미주 지역 전체 한인 인구(145만3671명)를 전체 한인 교회 수(3514개)로 나눈 결과 한인 413명당 1개꼴로 한인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미주 한인 교회의 소속 교단 비율을 보면 남침례회(SBC)가 16%로 가장 많았으며, 그 뒤로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 11%, 대한예수교장로회(미주합동총회)와 연합감리교(UMC)가 각각 8%로 파악됐다.

2021-06-23

[앤젤라 오] 한인 고교생 3명 낀 살인극에 미국 사회 충격

중류층 가정 출신의 모범생들 범행에 경악 가정교육의 중요성 새삼 되새기는 계기 돼 내 경험에 비춰보면 아시안 남학생들은 미국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그룹이다. 지금은 K-팝 등이 알려지면서 아시안 남학생의 매력이 여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 남학생은 체격이 왜소하다 보니 학교에서 존재감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면 눈길을 끌 수 있었다. 학교에서 외톨이가 된 남학생은 당연히 자신을 불러주는 친구와 어울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게 찾아온 찰스 채(17) 군도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된 케이스다. 실제로 아시안 남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미국에서 상영된 적이 있다. 백인이 다수 재학 중인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시안 학생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다. 중국계 감독이 촬영한 이 영화는 학교와 가정에서는 모범적인 4명의 아시안 학생들이 인종차별과 백인-아시안 문화 사이에서 겪는 갈등과 좌절감을 보여준 내용으로, 블록버스터급 흥행은 아니었지만, 아시안 커뮤니티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베터 럭 투모로우(Better Luck Tomorrow)’. 주인공들은 학교를 대표하는 경시대회에 출전해 입상하는 등 한마디로 학교를 대표하는 모범생들이다. 하지만 더 좋은 성적을 부모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학교생활을 한다. 결국 이들은 공모해 시험 전 에 답안지를 베끼는 부정행위로 성적을 올리다가 나중에는 친구도 살해하게 된다. 이들은 엘리트의 삶에서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한다. ▶베터럭 투모로우(Better Luck Tomorrow) 안타깝게도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이다. 오렌지카운티 부에나파크의 명문 고등학교로 알려진 서니힐스 고교 학생 5명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또 내 의뢰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2년 12월 31일 발생한 이 사건은, 서니힐스 고교에 재학 중이던 중국계 학생 로버트 챈(당시 18세)의 주도로 한인 학생 3명과 중국계 학생 1명이 공모해 동료 학생을 살해한 후 암매장한 것으로, 주류 언론들은 ‘우등생 살인사건(Honor Roll Murder)’으로 부르며 재판에 주목했었다. 당시 경찰 기록에 따르면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스튜어트 앤서니 타이(당시 17세)는 싱가포르 출신의 중국계 이민자의 아들로, 풋힐 고등학교의 수석 졸업생이었고 졸업 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의사였는데 침실이 11개,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가 있는 8000스퀘어피트 크기의 집에 살고 있을 만큼 부유했다. 타이의 살인을 주도한 챈도 대만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챈은 명문 하버드와 프린스턴대 입학 허가를 받아 놓고 고교 수석졸업을 다툴 정도의 수재였다. 공범으로 체포된 한인 학생들 역시 모두 모범 우등생에 컴퓨터 수재들이었고 가정 환경도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편이어서 사건이 알려진 후 한인 사회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학교에선 모범생 밖에선 범죄자 오렌지카운티 검찰이 당시 공개한 기소장에 따르면 사망한 타이와 주범 챈은 컴퓨터로 알게 된 친구 사이다. 타이는 모범생이었지만 밖에서는 무기 밀매를 일삼던 아시안 갱단의 보스 ‘마틴 고어’였다. 이들은 전화국의 비밀 코드를 컴퓨터로 뽑아내 해외 통화를 공짜로 하거나 크레딧 카드 관리회사의 중앙컴퓨터를 침범해 고객의 카드로 물품을 사들이는 등 컴퓨터 범죄를 저질렀다. 어느 날 챈과 타이는 평소 타이가 거래하던 컴퓨터 부품 딜러의 집을 털 계획을 세웠다. 챈은 강도 행각을 도울 다른 4명의 서니힐스 학생들을 모집했고, 에이브러햄 아코스타(16)와 한인 김 모(16) 강 모(17), 채 모(17)군 등이 가담했다. 하지만 이들은 우연히 타이가 떨어뜨린 지갑에서 타이의 이름과 주소, 학교 이름이 가짜라는 것을 발견했고 타이가 자신들을 경찰에 밀고하려는 것으로 단정해 살해하게 된다. 챈은 사건 당일 오후 5시쯤 타이를 아코스타의 집 차고로 유인해 함께 야구방망이로 타이의 머리를 때리고 쇠뭉치로 머리와 배를 10여 차례 내리쳤다. 그래도 타이가 숨지지 않자 챈 등은 타이의 입에 알코올을 붓고 테이프로 입을 봉한 후 20여 분 뒤 집 안에 미리 파놓았던 웅덩이로 끌고 가 묻어버렸다. 이때 김 모 군 등 한인 고교생들은 망을 봤으며, 범행 직후 일행은 타이의 닛산 300ZX 스포츠카를 운전해 흑인이 많이 거주하는 캄튼으로 옮겨서 버리고 오렌지카운티에 돌아와 새해맞이 파티를 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건 타이의 자동차가 부품이 뜯겨나간 채 발견되면서부터다. 처음엔 유괴살인으로 추정됐으나 타이의 부모가 고용한 사설 탐정의 활약으로 실체가 드러났고 결국 범인 전원이 경찰에 체포됐다. ▶잘못 사귄 친구로 살인 연루 사건의 끔찍함과 언론의 주목으로 재판은 팽팽하게 진행됐다. 법정에서 검찰은 내내 친구를 죽여 파묻은 아시안 모범생들의 빗나간 행위에 무거운 형별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망을 봤다는 이유로 공범으로 체포된 채 모군도 1급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사건이 발생하던 날 채군은 막 교회에서 진행되던 수련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잠깐만 보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간 곳이 범죄 현장 일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울먹였다. 그는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나중에 타이의 살인과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소년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2년 여에 걸친 재판에서 채군은 감형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다른 한인 학생들은 성인 법정에 서야 했고 범행의 잔인성 등으로 결국 25년 이상의 중장기형을 선고 받았다. 사건을 주도한 챈은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한인 가정 현주소 여전히 많은 한인 청소년들이 부모와의 갈등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한인가정상담소가 지난해 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0~18세 아동의 상담 건수가 적지 않게 차지하고 있다. 2018년의 경우 24명이 상담 받았는데 이는 전체 상담자의 12%를 차지한 규모다. 또 2019년에는 43명(17%), 2020년 31명(16%)이 상담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가정상담소는 통계 보고서에 “전체 내담자 중 25세 이상의 성인이 가장 많았지만 그 다음은 18세 미만의 아동이었다”며 이는 정부기금으로 운영되는 개인 상담 프로그램의 대상이 성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별도의 아동 상담 케이스 외에 부모간의 갈등으로 발생하는 부모-자녀와의 관계와 심리적 상태까지 포함한다면 이 수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한편 가정상담소는 “일반적으로 연말에는 전화 문의가 평소보다 적지만 2020년 11월과 12월에는 전년도보다 늘었다”며 “이는 계속된 팬데믹이 가족 관계와 심리적 상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6-16

[앤젤라 오] 유죄평결 15세 한인소년…변호사란 직업에 회의

훈육 이유로 학대당하다 엄마·여동생 살해 '비정한 아들'로만 부각 소년의 상처는 외면 “우리는 그의 2건 2급 살인혐의에 대해 유죄를 평결합니다.” 처음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실감을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랜초쿠카몽가 수피리어 법원의 천장만 쳐다봤다. 최소 40년, 가석방 되지 않으면 어쩌면 평생 감옥에서 지내야 할지 모른다. 한참 후 아이는 법정을 두리번거렸다. 어린 손자를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재판 초반에 결사적으로 매달리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외조부모와 이모 등 친척들을 찾는 듯 했다. 한참 후 아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더는 바깥 세상에 나갈 의미가 없어요.” 다시는 자유를 맛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어린 미성년 학생에게 차가운 법의 잣대를 내세운 법정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형사법 변호사가 된 후 처음으로 내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 ▶폴을 만나다 이모의 다급한 부탁에 만난 폴은 범죄 혐의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앳된 15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적용된 범죄 혐의는 얼굴과 나이에 맞지 않는 살인이었다. 그는 엄마와 여동생을 살해한 비극적인 사건의 범인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해보니 일반 남성도 다루기 어려운 이 총으로 엄마와 동생을 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렸고,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살인을 계획하고 죽일 만큼 악한 심성도 보이지 않았다. 폴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건을 다 갖춘 성공한 이민자 가정의 맏아들이었다. 사업가인 아버지 덕에 집안은 부유했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하며 두살 터울의 두 자녀를 돌보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폴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학대를 받고 있던 피해자였다. 사업차 잦은 출장 스케줄로 집을 자주 비우던 아버지는 훈육 차원이라며 폴을 엄격히 대했다고 전했다. 폴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성적이 굉장히 뛰어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곧장 매를 들었다. ▶외면당한 정신분석 자료 폴이 당한 학대는 학교에서도 일찌감치 감지했다. 폴의 등과 팔 등에서 심한 멍자국을 발견한 폴의 담임교사는 샌버나디노카운티 아동보호국에 신고했다. 그러나 신고를 받은 사회복지사는 경찰과 함께 폴의 집으로 찾아왔다. 당시 폴의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다. 사회복지사의 질문에 폴이 어떻게 대답을 했을지, 그리고 그가 돌아간 후 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사건 당일에 대해 폴은 기억이 많지 않았다. 무언가 실수를 했는데 어머니는 폴에게 “아버지가 돌아오면 얘기해서 혼나게 하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친구와 저녁 약속으로 집을 비운 아버지는 다음날 사업차 한국으로 출장을 떠나기로 돼 있었다. 늘 그랬듯이 아버지는 출장을 떠나기 전까지 심하게 혼낼 것이 분명했다고 했다. ‘어머니와 동생만 없으면 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를 테니 또 맞지 않겠지.’ 아버지가 벽에 걸어둔 사냥총이 눈에 보였을 것이다. ▶15살 소년에게 무기징역 이 사건은 한인 언론뿐만 아니라 주류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재판이 열린 랜초쿠카몽가는 백인 보수층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주류 언론에서는 단란한 아시안 가정에서 발생한 보기 드문 엽기 사건으로 계속 보도했고, 어머니를 죽인 비정한 아들의 무기징역 판결을 당연하게 여겼다. 어쩌면 이 역시 아시안을 향한 주류사회의 전형적인 편견과 선입관 때문이었을 수 있다. 가주 형사법은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는 형사범이 기소된 혐의에 대한 재판에서 유죄평결이 내려질 경우 범죄 발생 당시 피고인의 정신이 정상이었는지 여부도 배심원들이 함께 판단하도록 정하고 있다. 나는 폴이 심한 폭력으로 그의 뇌와 심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전문가를 증언대에 세우고 각종 학술 보고서까지 첨부해 제출했지만, 재판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폴이 범행을 저질렀을 당시 15살에 불과한 미성년자였다는 사실도 외면했다. 청소년기 성장 호르몬이 심리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남학생의 뇌는 최소 23세가 될 때까지 성장하며 심한 폭력이 정상적인 사고 능력을 없앤다는 뇌 분석 연구 결과가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됐지만, 당시에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했다. 배심원단은 평결 작업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2건의 2급 살인 혐의와 2건의 총기 사용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다. 다만 폴이 범행을 사전에 계획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1급 살인 혐의는 무죄 평결을 내렸다. 만일 폴의 재판이 지금 진행된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지금쯤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한인사회 사건들 한인사회에서 최연소 살인사건으로 기록되는 이 사건은 1999년 6월 12일 새벽 샌버나디노 카운티 업랜드시에서 발생했다. 업랜드경찰국 보고서에 따르면 폴 염(한국명 승철·당시 15세) 군은 사건 당일 잠을 자고 있던 어머니(염혜선·당시 38세)와 여동생 선엽(당시 9세)의 머리를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라이플총으로 차례로 쏴 살해하고 달아난 뒤 사건 발생 이틀 만에 라스베이거스의 리비에라 호텔 방에서 현지 경찰과 연방수사국(FBI)요원들에 체포됐다. 사건은 염군의 아버지가 인근 지역에 사는 친구와 식당에서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다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가 집안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염군이 발견된 호텔은 염군의 가정이 자주 놀러 가던 곳으로, 경찰은 호텔 방에서 잠자던 염군을 발견했고 주차장에서 염군이 운전한 차량도 찾았다. 염군이 범행에 사용한 총은 라스베이거스를 가는 길을 수색하던 중 발견했다고 경찰은 보고했다. 당시 경찰은 염군이 평소 학업 등에 대한 스트레스로 부모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염군의 재판은 샌버나디노카운티 형사법원 랜초쿠카몽가지법(담당 제라드 브라운 판사)에서 진행됐으며, 최종 선고 판결은 지난 2002년 3월 17일에 나왔다. 법원은 염군에게 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한 2급 살인혐의(15년~무기징역)와 총기를 사용해 살인한 혐의(25년~무기징역)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기록에 따르면 염군은 만 18세까지 청소년 구치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후 성인 교도소로 옮겨졌다. 염군은 최소 40년 복역을 마친 후에 가석방 청문회를 통해 석방될 수 있다. 염군의 가석방은 2040년 이후에나 가능하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6-09

[앤젤라 오] 미국법 몰라 전과자 된 한인들 속출

폭동 후 로펌에 한인 케이스 몰려 가정 폭력 여전히 '심각' …추방도 ▶실직으로 찾아온 법대 기회 LA 폭동 이후 29년이란 긴 시간을 한인사회에서, 또 주류사회에서 인종갈등의 원인과 봉합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여전히 인종 갈등은 존재하고 있고 최근에는 인종차별 범죄가 더 늘어나고 있다. 듣지 않는 청중들을 향해 같은 내용을 계속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지친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내 업보(Karma)라고 생각한다. 형사법 변호사가 인권과 인종 갈등을 위해 일하는 것부터 그렇다. 자아가 형성되던 어릴 때부터 소수계 인종을 위해 앞장을 섰던 것도, 기독교 집안에서 '명상과 도'를 찾게 된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원래 전공은 공중보건학이었다. UCLA를 졸업한 후 UC데이비스에서 직장 환경을 전문으로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당시는 경제 발전을 위해 직원이 무조건 기업을 위해 헌신하던 시기가 끝나가고 직원들의 안전과 복지에 눈을 뜨던 시기였다. 난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건강안전위원회'라고 불리는 커뮤니티 단체에서 일하며 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업무 환경의 중요성을 교육하러 다녔다. 논문을 위해 내가 방문한 곳 중 한 곳이 새크라멘토 소방국이었다. 화재 연기와 그을음 등 24시간 독성 물질과 함께 생활하는 소방요원들을 대상으로 폐 등 내부 장기는 물론 임신 가능성까지, 꼼꼼하게 직장환경을 조사했다. 건강안전위원회는 보고서를 토대로 가주 의회를 통해 독성 물질이 노출되는 직업환경을 차단하는 법안을 제안하고 이를 법으로 제정시켰다. 그 과정을 지켜보니 새로웠다. 가주의 법안이 채택되는 과정을 공부하고 싶었다. 공부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가주건강위원회와의 계약이 종료된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UC데이비스 법학대학원에 지원했다. 노동 현장에서 정책과 법을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법대에서의 시간은 무척 즐거웠다. ▶내 삶의 목표는 정의와 공정 좋은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커뮤니티 운동이나 자원봉사 활동은 생각지도 않았다. 법대 졸업 후 돈도 벌어야 했지만 경력도 쌓아야 했기에 북가주에서 인턴십 기회를 준다는 로펌에 입사했다. 주로 노동법 관련 케이스를 맡았는데 공중보건학 배경이 도움됐다. 처음 맡은 케이스는 경찰노조와 교사노조의 직장환경과 관련된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노조의 내부 분열과 싸움을 보니 계속 도움을 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LA로 돌아와 다운타운에 있는 민사 소송 전담 로펌 '버드, 마렐라 로펌'에 들어가 개인 상해 관련 케이스를 맡아서 일했다. 변호사가 되면서 버드 마렐라 로펌은 고마운 곳이다. 14년 동안 있으면서 나중에 파트너로 승격됐지만, 폭동 후 3~4년은 폭동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각종 비영리재단 업무와 강연 등으로 아예 일하지 못했어도 오히려 내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다. 지금도 돌아보면 너무 감사할 뿐이다. ▶폭동후 이름 알려져 케이스 몰려 하지만 언제까지 로펌도 나를 기다릴 수 없었다. 나를 찾는 케이스가 몰려들었다. 영어를 잘하는 한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1세들이었다. 의뢰하는 사건 이야기를 들으면 미국법을 제대로 모르고 비즈니스를 했다가 적발돼 검찰에 기소된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한 예로 알바라도와 램파트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한인 업주도 폭동 후 맡은 케이스 중 하나다. 벌벌 떨며 찾아온 50대 한인 업주의 죄명은 공문서 위조. 자세히 말하면 가짜 운전면허증 제작이었다. 하지만 업주의 얘기는 달랐다. 손님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해서 촬영해줬고 인화된 사진을 갖고 온 카드에 붙여달라고 해서 붙여줬을 뿐이라는 것이다. 카드가 운전면허증인지 알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알고 있었지만 사진이 맘에 들지 않아 바꾸려는 것인 줄 알았다고 억울해했다. 검찰은 징역형을 요구했지만 벌금과 커뮤니티 서비스로 합의해 낮췄다. 법과 문화를 몰라 범죄자가 된 한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고급 동네에서 비싼 차를 몰던 한인 부부도 찾아왔다. 알고 보니 가짜 비영리재단을 설립한 후 가족 구성원을 직원으로 채용했다고 속인 뒤 지역을 돕는 사업을 한다는 등 온갖 명목으로 정부 기금을 타서 쓰다 적발된 것이다. 그들이 정부를 속여서 타낸 돈은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그 돈으로 비싼 주택과 자동차를 구입해 말 그대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이들은 검찰의 기소장을 받자 어떻게 하면 형량을 적게 받을지, 돈을 돌려주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를 찾았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변호사로서 해줄 수 있는 조언을 해주고 돌려보냈다. 나중에 들으니 이 부부는 감옥에 가서 수감 생활을 하고 정부에서 받은 돈도 모두 토해냈다. 하지만 죄를 뉘우치지는 않은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뺏긴 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상담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으로 찾아오는 케이스도 꽤 많았다. 특히 매 맞는 남성이 꽤 많았는데 이 중에는 아내의 거짓말로 체포된 남편도 있었다. 유도 사범이었던 이 남편은 술만 먹으면 물건을 던지는 아내를 피해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놀란 이웃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돼 팬티만 입은 채 구치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경찰을 본 아내가 집안이 어지러워진 이유를 모두 남편 때문이라고 변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찰들은 여자가 물건을 던지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을 남편의 폭행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즉시 현장에서 체포했다. 하지만 블랙 벨트의 유도 사범이고 덩치가 큰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왜 거짓말을 해야 했는지 증명하기로 했다. 배심원들에게 검도인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진짜 일본 검도를 증거품으로 법원에 가져왔다. 남편이 아내를 때린다면 집 안에 있던 검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남편이 가르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증언이 적힌 탄원서도 제출했다. 케이스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한인사회 사건들 1990년대부터 가정폭력과 연루된 범죄사건은 한인사회에 비일비재했다. 한 예로 1994년 LA시 검찰청이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1993년 한 해 동안LA시 검찰청에 접수된 가정폭력 사건 1만6000건이며, 이중 아시아계 케이스의 80%가 한인 관련이었다. 2001년 LA카운티 검찰청 통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접수된 가정 폭력 케이스 4만 건 중 아시아계는 약 8000건이었으며 이중 한인 관련 케이스는 6000건을 차지했다. 연방 법무부가 2000년에 발표한 ‘캘리포니아주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1996~99년에 배우자 학대 등 가정폭력사건으로 한인이 구속기소 된 경우는 232명이다. 1998년 통계에서는 85명의 한인 남성이 배우자 폭행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됐으며, 15명은 중범으로 처벌받았고, 3명은 한국으로 추방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2020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올림픽경찰서에서 발표한 상반기 통계(1월~7월)를 보면 LA 한인타운에서 가장 체포가 많은 범죄는 ‘폭행’으로, 총 1582명을 체포했다. 이 중 227명(14.8%)이 ‘가중폭행(Aggravated Assault)’ 혐의였으며, 배우자 혹은 동거인 구타 상해(corporal injuries)가 132명으로 과반수(58%)를 차지했다. 한인타운 내 가정 폭력의 심각성이 여전한 셈이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6-02

[앤젤라 오] 왜곡된 한인 이미지 바로잡으려 동분서주

흑인문화 몰라 한인 업주들 피해 소수계 판사 배출 노력에도 총력 ▶문화 차이가 범죄 부르다 주류 방송에 출연한 후 나의 ‘대변인’ 역할에 대한 한인사회의 비난이 적지 않게 쏟아졌고 나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주류 방송국에서 내게 듣고 싶어하는 건 하나였다. 바로 LA 폭동을 보는 한인 피해자들의 시각과 생각이었다. 영어가 완벽한 한인 1세들을 찾을 수도 없고 있어도 나서지 않으니 영어권인 2세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내가 나섰지만 2세이기에, 이민 1세들과 생각의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한인 1세와 가장 큰 차이점은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인식이다. 당시 흑인 커뮤니티에서 장사하던 한인 업소에는 약탈과 절도가 빈번했다. 업소를 지키다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한 한인들은 셀 수 없다. 하지만 그 뒤엔 흑인사회의 문화를 잘 몰랐던 이유도 있었다. 당시엔 거리를 돌아다니는 갱들도 많았고 라이벌 갱단 간의 싸움과 총격전도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입는 옷의 색상조차도 조심해야 했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 갱단원들은 흰색 티셔츠에 배기바지, 얇은 벨트를 하고 다녔다. ‘크립스’로 불리던 흑인 갱단원들은 파란색이나 검은색 옷을 아래위로 맞춰 입고 다녔고, ‘블러드’ 갱단원들에게는 빨간색이 상징이었다. 반면 한인들에게 흰색과 파란색, 빨간색은 한국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이 때문에 갱단원들이 업소를 방문했다가 업주의 옷 색깔 등을 보고 라이벌 갱단을 지지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 흑인 커뮤니티는 지금보다 경제적 사정이 더 나빴다. 신선한 야채를 사려면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할 만큼 주거환경과 기반시설이 취약했다. 하지만 당시 한인들은 현금을 갖고 다녔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다녔다. ‘너희보다 낫다’는 모습을 보여준 한인들은 그래서 쉽게 범죄의 타깃이 됐다. 그러나 한인들의 삶을 제대로 보도하는 주류 언론은 거의 없었다. ▶소수계 판사 확대 추진 폭동으로 한인 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지원은 말 뿐이었다. 민권위원회 모임에서 만난 정부 인사들은 “관련 문제를 연구하겠다”고만 했다.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수십 명이 죽고, 사업체들은 약탈을 당하고, 인종 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구체적인 행동은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와 달리 흑인 커뮤니티에 이익을 환원하거나 협력 관계를 맺으려는 1세들도 거의 없었다. 사회환원이나 후원, 네트워크 등에 대한 미국식 사회시스템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LA시를 재건축하자고 제안했다. 갱단원들이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갱생 프로그램을 도왔고 인종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또 한인 비영리 단체들과 함께 비한인들을 돕는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방송을 통해, 기사를 통해 이런 생각과 프로그램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다인종 인권단체 및 법률 단체들이 행사의 스피커로 초대했다. 아시안 커뮤니티와 파트너십이 필요한 정계에서도 손짓했다. LA시 위기대응위원회 특별검사로 임명됐으며, LA시 인종위원회, 캘리포니아 주 검찰청, 연방 법무부 인권국, 백악관의 초청을 받았다. 1986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재판 때문에 법원을 드나들 때마다 아쉬웠던 점은 아시안 판사의 부족이었다. LA카운티 법원에서 한인은 고사하고 아시아계 판사를 마주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캘리포니아 주 검찰청에서 커미셔너로 임명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소수계 판사 채용 기회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수계 판사 1명을 임명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가주 검찰청, 주 상원 법사위원회, 주지사 사무실 등 관련 부처들과 끊임없이 만나고 의견을 개진하는 미팅의 연속이었다. 1998년 피트 윌슨 주지사는 LA카운티 지방법원(현 수피리어법원) 판사로 마크 김 씨를 임명했다. 당시 남가주에 한인 판사는 그가 유일했다. 한인사회에 오랜만에 가져다준 기쁜 소식이었다. ▶백악관 자문위원이 되다 백악관과 감옥의 공통점이 있다. 출입구에 24시간 경비원이 있고 감시카메라가 있다는 점이다. 1997년 LA 폭동 5주년을 맞아 LA의 폭동피해 현장을 찾은 빌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6월 대통령 직속의 인종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자문위원에는 나를 포함해 총 7명이 위촉됐다. 나는 2~3개월마다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 한흑갈등만이 아니라 미국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종 간 갈등 문제를 알리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연방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에 민간 컨설턴트로 참여해 고용 차별이나 괴롭힘을 당했다고 접수되는 사건을 모니터하고 자문했다. 이 밖에도 연방상원의원 바버라 복서의 연방 판사지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돼 연방 중부지법 판사 후보자들을 평가하는 책임을 3년간 맡았으며, 캘리포니아여성법률센터 이사, 연방 제9 순회법원콘퍼런스 변호사 대표, 가주사법이용위원회 커미셔너 등을 맡았다. 그곳에서 내 역할은 인종갈등을 중재하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법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무엇보다 주류사회가 가진 한인에 대한 이미지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한인 법조계 역사 미국에서 한인 판사가 가장 많은 곳은 LA카운티 수피리어 법원이다. 1998년 마크 김 판사(롱비치)를 시작으로 2002년 한인 첫 여성 판사로 임명된 테미 정 류 판사(캄튼 청소년 법원), 2003년과 2006년 각각 임명돼 앤틸롭 법원에서 함께 근무하는 리사 정 판사와 찰스 정 판사가 있다. 북가주에는 2006년 새크라멘토 카운티 법원의 헬레나 권 판사가, 2008년에는 샌타클라라 카운티 법원에 루시 고 판사가 임명됐다. 고 판사는 2010년 샌프란시스코 연방 지법 판사로 임명됐으며, 2016년에 제9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하와이 주에도 한인 판사가 다수 배출됐다. 지난 2010년 은퇴한 로널드 문 하와이 주 대법원장, 연방순회법원에 캐런 안 판사와 게리 장 판사, 글렌 J. 김 판사 등이다. 동부지역에도 다수 있다. 지난 2002년 메릴랜드 주에서 브라이언 김 판사와 지니 홍 판사가 탄생했다. 뉴욕주의 경우 1999년 뉴욕시 형사법원 판사로 임명된 전경배 판사에 이어 2005년 장애를 이겨내고 같은 법원의 판사로 임명된 정범진 판사가 있다. 전 판사와 정 판사는 모두 뉴욕시 검찰청과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을 거친 검사 출신이다. 선거를 통한 진출도 늘었다. 네바다주 노스 라스베이거스 제3선거구 판사직에 출마해 당선된 이기숭 판사가 있으며 LA카운티에서도 앤 박 판사, 수잔 정 판사, 토니 정 판사 등이 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5-26

[앤젤라 오] 한인 업주 총에 죽은 흑인소녀만 보도한 주류 언론

충격 받은 미국인 격려편지 쇄도 한인 일각 ‘왜 대변인하냐’ 비난 ▶테드 코펠 뉴스쇼에 출연 로스펠리츠 근처에 있는 ABC-TV 스튜디오는 주택가 동네만큼 조용했고 일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담당자의 안내로 들어간 스튜디오에는 조명과 카메라, 의자 뿐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벽 한쪽에 설치된 스크린이 켜졌다. 잠시 후 사회자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테드 코펠. 당시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ABC-TV 나이트라인 뉴스쇼의 메인 사회자였다. 뉴욕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그는 나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한인들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 흘렀기도 했지만 방영된 방송을 보지 않은 탓도 있다. 하지만 그날 내가 테드 코펠에 말한 메시지는 하나였다. 주류 언론의 잘못된 정보로 한인 커뮤니티가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인타운에 약탈과 방화가 진행돼도 LA경찰국(LAPD)이 모든 가용 경찰 병력을 베벌리힐스와 웨스트 LA 등 백인 지역에 배치해 출동하지 않고 있으며, 주지사의 명령을 받은 주방위군 역시 한인타운 외곽만 지키고 있어 실제 한인 상인들을 폭도들로부터 구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민 1세 한인 스몰 비즈니스 업주들의 어려움에 대한 내용도 알렸다. 주류 언론들은 오렌지 주스를 들고 있는 15살 흑인 소녀가 한인 리커스토어 업주에게 총을 맞고 죽었다는 내용만 끊임없이 반복해 보도했을 뿐, 정작 그 리커스토어 업주가 지역 갱단들로부터 얼마나 위협을 당해 왔는지, 강도와 절도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등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사망한 흑인 소녀가 업주를 폭행해 업주 역시 다쳤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이 모든건 백인과 흑인과의 갈등으로 생겨난 폭동이라고 말했다. 주류 방송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방송을 들은 미국인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변호사 사무실로 편지와 카드가 쏟아졌다. 일부는 한인 커뮤니티를 후원하고 싶다며 수표를 보내오기도 했다. 지금도 내 사무실을 담당했던 비서에게 감사하다. 그녀는 쏟아지는 카드와 편지를 정리해 내 책상에 두고 수표 등은 “관심을 보여줘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정중하게 쓴 편지와 함께 돌려보내는 일을 상당히 오랫동안 해야 했다. ▶쏟아지는 미국인들의 격려 파장이 이렇게까지 클 줄 몰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알아봤고 방송국마다, 언론사마다 나를 찾아다니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로펌에 제대로 출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폭동 후 사무실은 거의 출근하지 못했다. 피해를 본 업주들을 만나고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야 했다. 한인변호사협회(KABA)는 피해자 지원에 가장 먼저 앞장섰다. KABA는 한미연합회(KAC)와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의 전신인 한인청소년회관(KAC) 사무실에서 매일 늦게까지 피해자들을 만나 보험 신청이나 리스계약 등 법적인 문제를 도와줬다. 하지만 방송 출연 후 더 바빠지자 괜히 나갔다는 후회가 들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외부의 공격이 심해져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방송 출연은 KABA 회장이던 존 임 변호사의 설득 때문이다. 나이트라인의 부 프로듀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인 여기자가 방송에 나와 한인사회를 대변해달라는 전화를 받은 임 변호사는 자신보다는 내가 직접 출연해 미국인들에게 한인타운에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사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재판 때문에 법원을 늘 드나드는 내가 자신보다 말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인사회의 공격을 받다 나이트라인 뉴스쇼에 출연한 후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하게 됐다. 이 쇼는 방청객들이 있어서인지 내 얘기에 대한 반응도 즉각적이었다.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고 좋지 않게 보는 눈길도 느꼈다. LA타임스, 뉴욕타임스 등 주류 신문들도 내 인터뷰를 잇달아 실었다. 하지만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왜 나서느냐”는 눈길을 보냈다.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도 타운에 슬금슬금 퍼졌다. “돈을 벌기 위해서 방송 출연을 한다더라”는 말부터 “한국어도 모르면서 한인사회를 왜 아는 척하느냐” “한인 커뮤니티 대변인도 아니면서 왜 인터뷰를 하느냐”는 등 소문과 반발이 쏟아졌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며 우려했다. 급기야 부모님도 “좋은 말 듣지도 못할 일을 왜 나서서 하느냐”고 속상해했다. 한인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는 데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 그 사건 LA 폭동이 일어난 후 한인 커뮤니티에 지원금이 쏟아지면서 이로 인한 갈등도 생겨났다. LA타임스가 1992년 7월 31일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한인타운에 몰린 후원금은 약 660만 달러. 이중 한국에서 보낸 지원금은 450만 달러. 폭동 소식을 듣고 한국인들과 한국 기업가들이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모아 LA총영사관을 통해 전달했다. 나머지는 남가주 한인들과 주류 구호재단에서 후원한 돈이다. 물가를 기준으로 현재 화폐의 가치로 따진다면 무려 100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다. 하지만 지급 액수와 지급 방식 등을 놓고 한인 폭동 피해자들과 LA총영사관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소송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LA카운티수피리어 법원이 나서서 돈 지급 방식과 액수를 중재했다. 법원에서 공개한 합의문에 따르면 전체 지원금 중 560만 달러는 당시 폭동으로 피해를 본 업주 2400여 명에게 1인당 2300달러씩 나눠주도록 했다. 나머지 100만 달러는 한인 커뮤니티를 위한 기금으로 마련했다. 당시 이 기금으로 만들어진 게 폭동 피해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4·29장학재단(현 한미동포장학재단)이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5-19

[앤젤라 오] 수수방관 경찰…생활터전 지키려 총 들다

흑인변협과 기자회견 준비했지만 주류 언론들 외면으로 보도 안돼 ‘폭동(Riot)’의 사전적 의미는 ‘다수의 사람이 결합해 집단적 폭력 행위를 일으켜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일’이다. LA시는 1992년 4월 29일을 ‘시민소요(Civil Unrest)’가 일어난 날로 칭한다. 하지만 그날의 사태는 소요가 아닌 폭동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TV를 켰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지만 한인 스왑밋 건물의 불길은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불길이 솟구치는 건물은 늘어났다. 새벽이 다가오자 약탈이 시작됐다. 약탈꾼들이 불이 난 건물 주위 상점들을 부수고 들어가 물건을 훔쳐 나오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밤새워 지켜본 화면 속 LA는 ‘혼돈’ 그 자체였다. ▶4월 30일 둘째 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존 임 변호사를 만나러 나섰다. 임 변호사는 그해 한인변호사협회(KABA) 회장이었고 나는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한인 커뮤니티에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폭동이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한 상점과 건물들이 19곳으로 늘었다. 폭도들의 규모는 경찰들이 진압할 수 없을 만큼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사우스 LA를 지나 한인타운을 향했고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상점 유리창들은 깨지고 약탈행위가 이뤄졌다. ▶텅 빈 기자회견장 임 회장의 사무실에 한둘씩 동료들이 모였다. 회의에서 흑인변호사협회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모두 찬성했다. 90년대만 해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활동하던 유색인종들은 많지 않아 서로 가깝게 지내왔다. 흑인변호사협회도 한인들과 가까웠다. 당장 연락을 취하자 그쪽에서도 필요성을 절감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기자회견장은 올림픽과 플라워에 있는 아태법률센터(현 아시안아메리칸정의진흥협회) 콘퍼런스룸을 빌리기로 했다. 아태법률센터 설립자는 중국계인 스튜어트 쿼 변호사다. 그때만 해도 콘퍼런스룸까지 있는 사무실을 갖고 있는 아시안 법조인은 거의 없었다. 쿼 대표는 흔쾌히 사무실을 빌려주기로 했고 기자회견 내용과 관련해 이것저것 조언도 했다. 우리는 흑인변호사협회와 공동으로 보도자료를 만들어 주류언론사들에 뿌렸다. 임 회장과 나, KABA 회원들과 당시 흑인변호사협회장이었던 레이철 영 변호사와 마울라 얄랴 부회장 등 흑인 변호사들이 기자회견 시간에 맞춰 회견장에 속속 도착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모두 폭동 현장으로 몰려간 것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다 실망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차를 몰고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한인타운에는 약탈과 방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폭도 무리에는 흑인들뿐만 아니라 히스패닉들도 보였다. 그들은 상점에서 기저귀, 우유, 빵 등을 꺼내와 도망쳤다. 흑인들은 거리의 옷가게에서 옷들을 대량으로 훔쳐 뛰어갔다. TV와 운동화 등을 훔쳐 달아나는 폭도들도 곳곳에 보였다. 그들은 심지어 웃음까지 보이며 걸어갔다. 차량을 몰고와 약탈한 물건들을 싣고 가는 약탈꾼도 보였다. 하지만 화재와 약탈 현장에 경찰은 없었다. 경찰을 태운 차량은 사이렌을 켜고 폭도들 옆을 쏜살같이 지나갈 뿐이었다. 방화와 약탈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순찰차를 세우고 지켜보는 경찰들을 본 한 한인 업주가 물건을 훔쳐가는 폭도들을 가리키며 도와달라고 달려갔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니 분노가 일어났다. 경찰들이 없는 한인타운은 무법천지였다. 결국 오후가 되자 피트 윌슨 당시 가주 주지사는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투입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한인 사망 소식에 분노 당시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었다. 상대방에게 연락하려면 호출기에 번호를 입력해 알리는 방법뿐이었다. 휴대폰이 있기는 했지만 위성 전화 시스템이라 매우 커서 실제로 들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때 나는 회사에서 받은 업무용 휴대폰을 차 안에 갖고 다녔다. 그런데 그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폭도들이 가게를 침입했을 때 총을 쏴도 되는지 가주법에 관해 묻는 한인 고객이었다. 이 업주는 “이곳은 내 가게다. 폭도들의 약탈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한인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묻자 한국어로 나오는 라디오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총을 들고 대응하는 건 위험하며 불법 총기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 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동료 변호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고 보니 약탈과 방화를 두고 보지 못하겠다고 결심한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생활터전을 지키겠다고 가게에 총을 들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옥상으로 올라가거나 가게 문 앞에서 총을 들고 지킨다고 했다. ABC-TV, NBC-TV 등 주요 언론들이 총을 들고 가게를 지키는 한인들의 모습을 취재했다. 폭도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모습도 보여줬다. 그러다 한인 청년이 폭도로 오인당하여 사망했다는 참담한 뉴스가 나왔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때 그 사건 LAPD 기록에 따르면 92년 폭동 당시 목숨을 잃은 시민은 55명, 부상자는 2383명이다. 한인 사망자는 샌타모니카 칼리지에 재학 중이던 이재성(영어명 에드워드) 군이 유일하다. 그는 한인타운 곳곳이 불에 타자 친구들과 함께 한인업소를 지키려고 나갔다가 오인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이군은 3가와 호바트 코너에서 폭도들과 경찰 간의 총격전 와중에 머리에 총탄을 맞아 숨졌다. 이군은 당시 위험하니 집 안에 있으라는 부모의 간청에 “한인들과 한인사회가 내 도움이 필요하고 있다”며 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군의 사망 소식이 나온 후 한인타운은 폭도들에 대응하는 총기사용을 자제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또 한인사회는 주류사회에 폭동 종식을 호소하는 평화행진을 벌였다. 당시 평화행진에는 3만 명의 한인들이 참가한 것으로 기록됐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5-12

29년전 LA폭동 울분 뿐이던 한인들의 대변인

LA 한인타운의 얼굴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앤젤라 오(65) 변호사다. 1992년 4월 29일 시작된 LA폭동으로 무너진 삶의 터전을 보고 망연자실 했던 한인들의 울분을 주류 언론에 알리며 한인사회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녀다. 영어가 부족해 따지지도 못하고 억울함을 풀어놓지도 못하던 한인들을 대신해 미국인들이 즐겨보는 TV 토크쇼에 나가 대신 싸워주던 자랑스러운 한인 2세였다. 하지만 여전히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거리는 멀다. 최근 아시안 증오범죄의 증가로 한인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치력 신장과 인종화합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높아지는 시점이다. 미주중앙일보가 연재하고 있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의 다섯번 째 주인공인 오 변호사는 UC데이비스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로펌을 다니던 잘 나가는 형사법 전문 변호사였다. 하지만 폭동 이후 그녀의 삶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주요 정치인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인물이 됐고 주류 언론들이 찾는 인터뷰 대상이었다. 백악관 자문기구인 인권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며 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오 변호사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간혹 학회 세미나의 강연자로 이름을 볼 수 있었지만,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모습은 더는 찾기 어려웠다.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뒤로 한 채 오 변호사가 선택한 삶은 봉사와 명상을 하는 ‘진짜 중재자’였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를 대신해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인종차별 사건을 맡아 피고와 원고를 합의시키는 중재자가 됐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일이지만 오 변호사는 그곳에서 ‘행복’을 찾는다. LA 폭동은 한인사회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다. 오 변호사가 들려주는 그 날의 이야기는 한인 커뮤니티의 풀어야 할 과제와 비전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관계기사: TV뉴스 속 한인 스왑밋 불길이 폭동의 시작

2021-05-05

[앤젤라 오] TV뉴스 속 한인 스왑밋 불길이 폭동의 시작

경찰차·소방차 사이렌 "집에서 나오지 마세요" 2020년 5월 25일. “숨을 쉴 수가 없다. 살려달라.”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짓눌려진 채 외치는 흑인과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누르며 웃고 있는 백인 경찰의 얼굴을 보여주는 동영상이 페이스북 링크와 이메일로 계속 날아왔다. 이상하다.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TV 리모콘을 찾아 뉴스 채널을 틀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든 뉴스 채널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파우더 호른의 한 거리에서 발생한 사건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었다. 뉴스 속 영상에는 고통스럽게 죽어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얼굴과 신음과 절규를 무시한 채 계속 그의 목을 무릎으로 찍어 누르며 동료들을 향해 웃는 백인 경찰 데릭 쇼빈의 얼굴이 클로즈업돼 있었다. 방송 기자들은 그가 이용한 식당에서 위조지폐 사용이 의심된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출동한 경찰들이 자신의 차에 앉아 있던 플로이드를 내리게 한 뒤 땅바닥에 눕히고 수갑을 채우고 반항도 하지 않은 그의 목을 눌러 질식시켰다고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한참 동안 뉴스를 보다가 TV를 껐다. ‘또 폭동이 일어나겠구나.’ 직감이 들었다. 앤젤라 오 변호사의 머릿속은 29년 전 4월 29일의 기억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여전히 뚜렷한 4·29의 기억 그날 스케줄은 조금 빠듯했다.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맡고 있던 의뢰인의 보석 석방 신청 마감일이 다가와 관계기관에 계속 전화를 했지만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의뢰인은 오랫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였다. 주먹을 휘두르던 가해자를 죽이고 경찰에 체포된 그녀는 삶을 자포자기하고 있었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그날 오후에는 유대인 커뮤니티가 주관하는 차세대 리더 교육 프로그램의 강사로 초빙돼 참석해야 했다. 당시 LA는 커뮤니티 간에 왕래가 거의 없었다. 차이나타운, 리틀도쿄, 코리아타운, 웨스트LA, 사우스LA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때 유대인 커뮤니티가 나서서 한인 커뮤니티와의 교류를 시도한 것이다. 한인변호사협회(KABA) 수석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나는 수개월 전부터 행사의 의도를 설명하며 한인 커뮤니티를 초청한 유대인 관계자에게 행사 장소로 한인타운의 한식당으로 추천했는데 의외로 좋아했다. 그래서 이 행사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강연을 마치면 사우스LA에 있는 흑인 커뮤니티의 대표적인 교회 ‘퍼스트AME 교회’에 달려가 흑인 리더들과 간단한 미팅을 하기로 약속했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다인종위원회에서 두순자 사건 이후 참석을 권유한 것이다. 다행히 보석신청 마감 시간 직전 집행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의뢰인도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게 됐다. 가벼운 마음으로 로펌 사무실을 떠났다. LA다운타운에 있는 사무실을 떠나 차를 운전하고 오면서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앵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죄, 무죄, 무죄. 불일치 배심(Hung jury).” 로드니 킹을 폭행한 4명의 경찰관이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는 판결 내용이 반복됐다. 두순자 이름이 흘러 나왔다. 서둘러 행사장을 찾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모임은 이미 시작됐다. 한식을 소개하면서 인종간 단합을 얘기하려던 주제는 판결 소식을 들은 참석자들의 두씨 사건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었다. 강연을 끝내고 양해를 얻어 먼저 식당을 나서는 데 한쪽 벽에 설치된 TV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속보’라는 커다란 글자 뒤로 깜깜한 화면 속에 불길이 치솟는 건물이 보였다. 위치가 낯설지 않았다. 한인 업주들이 대부분이었던 스왑밋 건물이었다. 식당 내부가 술렁거렸다. 손님들은 식사를 중단하고 TV뉴스에 집중했다. 오후 8시쯤 됐을까. 컴컴한 거리에 경찰차와 소방차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뉴스에서 가능한 집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안내가 나오기 시작했다. 식당 손님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퍼스트AME 교회에 가려던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LA폭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 그 사건 LA폭동을 일으킨 원인으로 꼽히는 두순자 사건과 로드니 킹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로드니 킹 사건은 1991년 3월 3일에 일어났다. LA경찰국(LAPD) 소속 백인 경찰관 4명이 과속으로 프리웨이를 달리던 27세 흑인 청년인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사건이다. 이날 자정쯤 LA 근교인시미밸리 210번 프리웨이를 과속으로 달리던 현대 승용차를 5∼6대의 경찰차가 뒤쫓은 끝에 멈춰 세웠다. 백인 경찰관들은 그 차를 음주하고 운전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끌어내려 경찰봉과 주먹, 발길질로 구타했다. 구타 장면은 근처 아파트에서 한 시민이 녹화했고 이 녹화 테이프는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 발생 13일 뒤인 3월 16일 일어났다. 사우스LA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던 두씨가 15세 흑인 소녀인 라타샤 할린스를 오렌지 주스 절도범으로 오인해 권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배심원 재판은 두씨에게 2급 살인으로 유죄를 평결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범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고 우발적인 점을 들어 징역형 대신 400시간의 사회봉사 활동 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5년)을 선고했다. 두씨는 벌금 500달러와 라타샤의 장례식에 관련된 모든 비용도 지불했다. 두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분노한 흑인들이 케이스를 맡은 백인 판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법원 앞에서 벌이기도 하고 항소도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그러던 중 로드니 킹 구타에 가담한 경찰관 4명이 배심원 재판에서 3명은 무죄, 1명은 재심사 평결을 받은 것이다. 이 재판의 경우 백인 지역인 시미밸리 법원에서 진행됐는데 12명의 배심원 중에서 백인이 10명이었고, 히스패닉과 아시안이 각각 1명이었다. 배심원들의 무죄 판결은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 20분 TV와 라디오를 통해 즉각 발표됐고 LA시장이었던 흑인 톰 브래들리는 “믿을 수 없는 결과”라며 분노했다. 판결이 나온 후 흑인들은 사우스LA 거리로 뛰쳐나와 달리는 트럭에서 백인 운전사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그대로 TV로 방영됐고 약탈과 방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202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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